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추미애/정계 활동 (문단 편집) == 3선·4선 의원 == [[2008년]]에 치러진 [[18대 총선]]에 [[통합민주당(2008년)|통합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광진구 을]]에 재도전하였고, 51.3%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대한민국 국회]]에 복귀[* 3선]하였다.[* 당시 한나라당이 대선 직후 치뤄진 총선에서 서울 지역을 휩쓸다시피 했음에도 의석을 획득한 몇 안되는 서울 지역구 여성 의원이다. 서울 지역에서 총 세명의 여성의원이 당선되었는데 이미경 의원과 박영선 의원, 추미애 의원이다.] [[제18대 국회]]에선 대부분의 국회의원들이 기피한다는[[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5&aid=0003947093|#]]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8&aid=0003491273|#]] 환경노동위원회의 위원장직을 상반기(2008년 ~ 2010년)에 맡았다.[* 참고로 17대 때는, 한나라당 [[홍준표]]와 [[이경재(1941)|이경재]]가 상임위원장직을 맡았다.] 그리고 2009년 7월, 정부와 여당(한나라당)은 '비정규직 2년 이상 사용금지 법[* 2년 이상 사용하려면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규정]' 의 시행이 유예되지 않으면 100만 실업(해고) 대란이 날 것이라고 엄포를 놓으며, 야당과 추미애 위원장에게 압박을 가하였다. 그리고 정부와 여당은 오히려 비정규직 사용 기간을 4년으로 연장하는 내용으로 법을 개정하려 하였다. 하지만 추미애는 양대 노총이 참여하는 ‘5자 합의’가 나오지 않으면 상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정부·여당의 법 개정 시도를 막아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2&aid=0002017796|#]] 당시 추 위원장은 한나라당 소속 한노위원들이 '위원장의 사회 기피 또는 거부' 운운하며 사회권 접수를 시도할까봐, 사회권 거부로 해석될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계속 위원장실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며, 화장실 가는 것도 이석했다고 할까봐, 한나라당 소속 위원들이 회의장을 떠난 것을 확인하고 갔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1956385|#]] 이후 정부의 엄포와 달리 100만 대란설은 실태조사를 통해 허구임이 입증됐고[[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1&aid=0002023918|#]][[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8&aid=0001984297|#]], 2년 이상 사용금지 법 시행 이후 2달 만에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율이 63%에 달하였다는 통계가 나왔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010755|#]] 이에 추미애 위원장은 "정부 여당이 주장하던 100만 해고대란설은 거짓인 것으로 드러났다. 사용기간 연장을 추진하는 대신 정규직 전환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당초 노동부가 비정규직 사용시한 4년 연장의 전제로 주장했던 100만 대량 해고는 일어나지 않았다"며 "한나라당과 노동부는 그동안의 가설 자체가 허구였다는 것이 증명된 이상 비정규직법 무력화를 포기하고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2848901|#]] [[2008년]] 9월, 이명박 대통령과 국회 상임위원장단 간 청와대 회동에서 추미애는 이 대통령에게 당시 정부가 추진하던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과 관련하여 "이념갈등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 된다"며 비판했다. 이날 이 대통령에게 했던 발언에 대해 며칠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사건건 대립각으로 몰고 간다는 점을 지적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이 닮았다는 말을 하던데, 공감 가는 부분이 있다. 노 전 대통령도 초기에는 이념적 편가르기에 몰입했고, 이 대통령도 방식만 다를 뿐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극단으로 가는 것에 대해 국민들은 지쳤다. 국민 인식은 이미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서 성숙해 있다."고 했다.[[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1946622|#]] [[2009년]] 5월, 정세균 민주당 대표의 개혁정책인 뉴민주당 플랜에 대해 "뉴 민주당 플랜은 그 자체가 노무현 프레임에 갇혀 있고, 이명박 정부가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의 아류와도 같다"고 주장했다.[[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79&aid=0002057254|#]]또한 프레시안의 표현을 빌리자면 추미애는 전주 우석대 강연에서 뉴민주당플랜과 노무현 정부에 대해 직접적이고 원색적으로 비판하였는데, "뉴 민주당 플랜이 한나라당의 정책과 무슨 차별성이 있으며 좌회전 깜박이 넣고 우회전 정책을 추진한 노무현 프레임과 무슨 차이점이 있겠느냐"며, "민주당이 외면 받는 이유는 입으로는 중산층·서민을 말하면서도 정책으로는 비정규직 증가, 양극화 심화, 그리고 시장에 권력이 넘어갔다고 하면서 대기업과 금융에 대한 규제 포기, 한미 FTA 등 신자유주의를 무분별하게 도입한 데 있다"고 하였다.[[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94794|#]] [[2009년]] 12월에는 노조법 개정이 이슈였는데, 합의가 여의치 않았다. 이에 추미애 위원장은 여야와 양대 노총이 참여하는 ‘8인 연석회의’를 마련했고, 이를 토대로 여야 및 노총의 주장을 종합한 ‘추미애 중재안’을 만들었다. 이후 당내 반발을 무릅쓰고 소신에 따라 환노위 전체 회의를 진행하였는데, 야당 의원들은 토론을 거부하며 퇴장하였다. 결국 여당 의원들만 남아 있는 가운데 노조법 개정안은 환노위를 통과했다.[* 환노위를 통과한 개정안은 '추미애 중재안'을 일부 수정한 것이었다.] 이후 추미애는 "마치 십자가를 진 사람처럼 무거운 마음이고, 또 외로운 마음"이라고 하였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3022353|#]] 한편 야당 의원의 회의장 출입이 봉쇄된 것 아니냐는 얘기가 있었는데[[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97593|#]], 추 위원장은 "출입이 봉쇄된 적도, 저지된 적도 없다.", "회의장을 봉쇄하라고 지시한 바 없다. 수석전문위원에게 환노위원들만 입장하도록 지시했다[* 회의장이 소란스러워지자 추 위원장은 환노위와 노동부, 국회사무처 관계자들을 제외한 사람들을 회의장에서 내보내는 질서유지권을 발동했었다.]."고 하였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1963639|#]] 이 일로 인해 추 의원은 당시 회의 진행에 [[어딜 만져|강하게 항의하던]] 민노당 등에 의해 국회 윤리위에 제소되었고, 당내에서는 2개월 당원 자격정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추 위원장은 "같은 상황이 와도 선택엔 변함이 없다"고 하였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7&aid=0000009350|#]] 한편 해당 법안은 이후 본회의를 통과되어 법률로 확정되었는데, 이 법에 대해서는 평가가 갈린다. 노동계 내에서도 비판적 의견을 가진 언론이 있는가 하면[[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102421|#]], 전교조나 한국노총처럼 추 위원장에게 고마움과 지지를 표한 곳도 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5&aid=0002188417|#]] [[2011년]]에는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 선출을 위한 민주당 경선에 출마하였다. 이 경선에서는 같은 당의 [[박영선]] 의원이 추미애 의원 등을 꺾고, 민주당 후보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당시 재야에 있던 [[박원순]]이 최종적으로 야권 단일 후보가 되었고, 이후 본 선거에서 서울시장으로 당선되었다. [[2012년]]에는 [[19대 총선|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통합당]] 후보로 [[광진구 을|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55.2%의 득표율로 당선되었고, 2012년 [[18대 대선|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 선거 캠프의 ‘국민통합위원장’으로도 활동하였다. 그 이전에는 [[민주통합당]]의 최고위원에 당선되었다. [[2013년]]에는 저서 <물러서지 않는 진심>을 냈다. 이 책에서 추미애는 노무현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해 “대선운동을 해냈고 같이 부둥켜안고 승리를 기뻐했던 대통령과 인간적인 해후를 하지 못한 채 영영 작별했다”면서 “사과의 타이밍을 놓친 것을 무척 후회했다”고 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2&aid=0002728363|#]] [[2015년]]에는 [[새정치민주연합]]의 2.8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된 [[문재인]]에 의해 지명직 최고위원에 임명돼 문재인 지도부에 합류하였다. 한편 2015년 4월 7일, [[동교동계]]의 좌장인 [[권노갑]]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고문이 "당 운영을 할 때 주류는 60%, 비주류는 40%를 맡는 게 관행"이라는 발언[[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50408190513282|#]]을 하며 문재인 당시 대표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는데, 권 전 고문의 문제의 발언이 나온 다음 날인 2015년 4월 8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추미애는 "지지 세력을 받들고 챙기라는 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언이지, 지분을 챙기라는 게 [[김대중|그분]]의 뜻은 아닐 거다"라며 동교동계에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50408135506503|#]] 당시 주승용 등 비노계 최고위원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문재인 당시 대표의 사퇴를 주장하며 문 대표를 흔들어댔고, 결국 안철수가 주축이 되어 [[국민의당(2016년)|비노계의 연쇄 탈당 사태]]가 일어났다.[[https://www.huffingtonpost.kr/2016/08/29/story_n_11757072.html |#]] 하지만 당시 최고위원이던 추미애는 탈당 대열에 동참하지 않았고, 오히려 ‘반노’와 비주류의 공세로부터 문재인 대표를 적극 방어했다. 2015년 12월, 안철수가 혁신전당대회를 요구하며 문재인 대표의 사퇴를 압박하고, 당 지도부 안에서도 비노계의 반발이 거세질 당시 추미애는 “각자 목소리를 내서 파편조각처럼 내뱉는 말이 멋지게 들릴 수는 있어도 문제 해결에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등 문재인 대표를 적극 옹호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4&oid=037&aid=0000022033|#]] [[새천년민주당]] 분당 사태 때도 분열에 반대했고, [[새정치민주연합]] 시절의 분당 사태 때도 역시 분당에 반대하고 문재인 대표를 지키며 소속 정당 충실했던 성향은 이후 [[더불어민주당]]의 당 대표 선거에 도전할 때 긍정적인 평가로 돌아오게 된다.[[https://www.huffingtonpost.kr/2016/08/29/story_n_11757072.html|#]] [[http://news.joins.com/article/20513050|#]] 실제 추미애는 1995년, 정계입문하면서 민주당에 들어온 뒤, 한 번도 탈당을 한 적이 없다.[[http://news.joins.com/article/20513050|#]] 소속 당이 당명을 변경해서 당적이 바뀐 적은 있어도, 스스로 당적을 바꾼 적은 한번도 없었다. 안철수와 소위 동교동계가 문재인 당시 대표를 비판하면서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하여 신당(국민의당)을 창당하려는 분당 사태가 일어난 2016년 초, 추미애는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에서 "저는 1995년 여름에 제 일생 입당원서라고 한 번 써봤다. 쓸 때 무척 손이 떨렸다. 그때 제 마음은 내가 정치호적을 지금 작성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했다."며 "호적을 함부로 바꿔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23&oid=305&aid=0000018087|#]]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에도 참여했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법이다."라고 연설을 했다. [[위안부 합의|일본군 위안부 합의 타결]]에 대한 반발로 [[더불어민주당]]에서 만든 대책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기도 했고,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신의 지역구인 [[서울특별시]] [[광진구]] 을에서 [[새누리당]] 후보와 [[국민의당(2016년)|국민의당]] 후보의 3파전이라는 불리한 여건을 극복해내고 43,980표(득표율 48.5%)를 얻어 당선돼 여성 정치인으로서는 헌정 사상 최초로 지역구 5선 국회의원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물론, 그 이전 19대 총선에서 [[이미경(정치인)|이미경]] 의원과 [[박근혜]] 당시 의원이 5선을 달성하였고, 훨씬 전에는 [[박순천]] 의원이 5선을 달성한 바도 있으나 이 세 사람은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최소 1번 이상은 거친 것이거나 재보선 당선과 사퇴 등으로 임기를 마치지 못한 경우이다. 반면, 추미애 의원은 단 한 차례도 비례대표를 거치지 않고 순수하게 지역구로만 5선을 달성한 것이니 대단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하다.] 그것도 여론조사에서는 오차범위 안의 접전이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여유롭게 승리했다. [[국민의당(2016년)|국민의당]] 후보의 출마로 야권 표가 분산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지역구에서 인기나 인지도는 탄탄한 모양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